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낭 포슈 (문단 편집) ==== 위기의 제2군 ==== 포슈는 5일 곧바로 제9군을 험버트에게 맡기고 밤중에 카스텔노의 지휘부로 이동해 6일 새벽 4:30분에 도착했다. 그러나 카스텔노는 2주간 독일군을 우회하도록 노력한 것에 비해 오히려 우회당하고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노병으로 구성된 부제르군은 엘리트 [[프로이센]] 근위군단과 싸우고 있었다. 모쥬이는 독일군의 공세가 버거운 나머지 즉시 후퇴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보불전쟁|스당에서의 패배]]가 재현될 것이라 경고했다. 본부의 낙관적인 시각과 달리 일선에서의 상황은 상당히 심각했다. 포슈와 카스텔노의 회의 또한 파토났다.[* 카스텔노와 포슈의 관계를 작살낸 모르주 사태로부터 2달도 채 되지 않았으며, 그 당시 카스텔노가 포슈의 상관이었다면 이제는 포슈가 카스텔노의 상관으로 뒤바뀌었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그 외에도 카스텔노와 포슈는 둘 다 이른 새벽에 회의했기에 신체적으로 피로했다는 점과 두 명 모두 전쟁으로 아들을 잃었다는 점 또한 회의의 파토에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카스텔노는 지원이 없다면 후퇴하지 않는 이상 전선이 뚫릴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인 견해를 비쳤으나 포슈는 이 의견을 무시했다. 곧 함성으로 이어진 격렬한 항의에 불구하고 포슈는 본부에서 곧 지원이 올 테니 어떻게든 버티라는 지시를 남긴 채 모쥬이의 지휘부로 이동했다. 포슈가 도착하기 전에 모쥬이는 제한적인 후퇴를 명했으나 포슈와의 대화 후 명령을 바꿔서 반대로 공세를 명했다. 얻은 영토는 그닥 보잘것없었으나 독일군의 기병 돌격을 격퇴해 독일군 지휘관 게오르크 폰 데어 마르비츠(Georg von der Marwitz)가 정면 돌파가 불가능하다고 [[빌헬름 2세]]에게 보고하는 등의 성과는 있었다. 독일군의 맹공에 카스텔노가 우려했듯이 제2군이 약간 밀려나는 피해도 있었으나 조프르의 병력 지원 덕에 제2군은 위기를 이겨내고 팔켄하인은 릴 지역에 관심을 두고 제2군에 대한 공세를 중단했다.'[* 결국 바다로의 경주'의 요충지는 릴과 이프르가 되었고 특히 이프르에서는 제1차 이프르 전투가 벌어졌다.] 10월 1일과 6일 사이에서 솜 강과 플랑드르 사이에서 적의 저항을 분쇄하는 임무를 맡았던 독일군 제6 군의 공세는 프랑스 제10 군에 의해 저지되어 실패했다. 결정적인 전선에서 조프르의 대리로 활동했던 포슈는 "퇴각은 없다. 모두 나가 싸우라"라는 명령을 내리며 아군을 독려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